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1년 사순 시기 담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1년 사순 시기 담화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마태 20,18)
사순 시기: 믿음, 희망, 사랑의 쇄신을 위한 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당신 사명의 가장 깊은 의미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당신의 사명에 동참하도록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파스카 거행을 향해 가는 우리의 사순 여정 안에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던”(필리 2,8) 분을 기억합시다. 이 회개의 시기에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희망의 “생수”를 길어 올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형제자매가 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입시다. 파스카 성야에 우리는 세례 서약을 갱신하고 성령의 활동에 힘입어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이번 사순 여정은, 그리스도인 삶의 순례 여정이 모두 그러하듯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생각과 태도와 결정에 영감을 주는 부활의 빛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듯이(마태 6,1-18 참조), 단식기도자선은 우리의 회개를 가능하게 하고 드러냅니다. 가난과 극기의 길(단식), 가난한 이를 위한 관심과 사랑의 돌봄(자선), 그리고 자녀로서 하느님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기도)는 우리가 진실한 믿음과 살아 있는 희망과 실질적인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1. 믿음은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모든 형제자매 앞에서 그 증인이 되도록 우리를 촉구합니다

이번 사순 시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세세대대로 전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연다는 의미입니다. 이 진리는 몇몇 지식인들에게만 유보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알아차리기 이전부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열려 있는 마음의 지혜 덕분에 우리가 모두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이 진리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인성을, 그 한계까지 모두 취하심으로써, 쉽지는 않지만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생명의 충만함으로 이끄는 길이 되신 분이십니다.

극기의 한 형태인 단식은 단순한 마음으로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선물을 재발견하게 도와주고,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분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그분 안에서 충만에 이르는 피조물인 우리의 현실을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가난의 체험을 받아들임으로써, 단식하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가난해지고, 주고받는 사랑의 보물을 쌓아갑니다. 이렇게 단식은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러한 사랑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말한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쏟고 그들을 우리 자신과 하나로 여기는, 밖으로 향하는 움직임입니다(「모든 형제들」, 93항 참조).

사순 시기는 믿음의 때입니다. 우리의 삶 안으로 하느님을 환대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함께 사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때입니다(요한 14,23 참조). 단식은 소비 지상주의 또는 참이든 거짓이든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와 같이 우리를 짓누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가 되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 모든 것 안에서 가난해지셨으나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요한 1,14)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아드님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2. 우리의 여정을 지속하게 해 주는 “생수”인 희망

예수님께서 마실 물을 달라고 청하셨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생수”(요한 4,10)를 주실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인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을 마시는 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충만하게 주실 성령,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을 선사해 주시는 성령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과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하실 때,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마태 20,19)이라며 이 희망에 관하여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 열린 미래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희망한다는 것은, 우리의 과오, 폭력과 불의 또는 사랑이신 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 때문에 역사가 끝나지 않음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열린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이 위태롭고 불확실해 보이는 요즈음과 같은 시련의 때에 희망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도전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순 시기는 우리가 빈번히 착취해 온 당신의 피조물들을 계속해서 끈기 있게 돌보시는 하느님께로 되돌아서는 희망의 시기입니다(「찬미받으소서」, 32-33항, 43-44항 참조). 바오로 성인은 화해에 우리의 희망을 둘 것을 촉구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 우리의 회개 과정의 중심에 있는 성사를 통하여 용서받음으로써 우리도 이웃에게 용서를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용서를 받았기에 우리는 다른 이들과 사려 깊은 대화를 나누고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의지로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전해지는 하느님의 용서는 형제애의 파스카를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사순 시기 동안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 “격려의 말”을 전합시다. “이러한 말은 위로와 위안이 되며 힘과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 이는 “비하하거나, 슬프게 하거나, 화를 불러일으키거나, 멸시하는 말이 아닙니다”(「모든 형제들」, 223항).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은 때로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친절한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걱정거리나 긴급한 일들을 제쳐두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미소를 선사하며 격려의 말을 건네고 만연한 무관심 가운데에 경청하고자 합니다”(「모든 형제들」, 224항).

묵상과 침묵 기도를 통하여 희망은 영감이자 내적 빛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우리의 사명 안에서 마주하는 도전과 선택에 빛을 비춥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랑의 아버지와 내밀하게 만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마태 6,6 참조).

희망으로 사순 시기를 보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묵시 21,1-6 참조) 새로운 시대의 증인들임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고 사흗날에 하느님께 들어 높여지신 그리스도의 희망을 받아들이는 것과 “[우리가]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는”(1베드 3,15) 것을 의미합니다.

3. 모든 이를 위한 관심과 연민으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랑은 우리의 믿음과 희망의 가장 고귀한 표현입니다

사랑은 다른 이들의 성장을 보며 기뻐합니다. 그러하기에 다른 이들이 근심에 휩싸이거나 외로워하거나 아프거나 집이 없거나 멸시당하거나 궁핍한 처지인 것에 아파합니다. 사랑은 마음의 도약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우리 자신 밖으로 나가게 하고 나눔과 친교의 유대를 이루게 합니다.

“‘사회적 사랑’은 사랑의 문명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사랑의 문명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부름받았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보편적 역동성을 지닌 애덕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애덕은 그저 공허한 감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발전을 위한 효과적인 길을 발견하는 최상의 방법입니다”(「모든 형제들」, 183항).

사랑은 선물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고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우리의 가족, 친구, 형제자매로 바라보도록 해 줍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사랑으로 함께 나누면 결코 고갈되지 않고 생명과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이것은 엘리야 예언자에게 빵 한 조각을 내어놓은 사렙타 과부의 밀가루 단지와 기름병과 같고(1열왕 17,7-16 참조), 예수님께서 축복하시고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신 빵 다섯 개와 같은 것입니다(마르 6,30-44 참조). 또한, 작든지 크든지 기쁘고 소박하게 베푸는 우리의 자선도 이와 같습니다.

사랑으로 사순 시기를 보내는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전 세계 확산으로 고통받고 있거나 소외와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을 돌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가 너무나 불확실한 이때에, 주님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43,1). 애덕을 통하여 우리는 확신의 말을 전하고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깨닫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애덕으로 달라진 시선은 다른 이들의 존엄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 애덕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가난한 이들의 무한한 존엄을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이로써 가난한 이들은 그들의 고유한 정체성과 문화 안에서 존중받고, 사회에 참으로 통합될 것입니다”(「모든 형제들」, 187항).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시간입니다. 회개와 기도와 가진 것을 나누는 여정으로 사순 시기를 보내라는 부르심에 힘입어 우리는 공동체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믿음과 성령의 숨결이 불러일으키는 희망과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한없이 샘솟는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그리고 교회의 중심에서 언제나 충실하신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당신 사랑의 현존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파스카의 빛을 향한 여정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0년 11월 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프란치스코

  • 이탈리아어: http://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messages/lent/documents/papa-francesco_20201111_messaggio-quaresima2021.html
  • 영어: http://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messages/lent/documents/papa-francesco_20201111_messaggio-quaresima2021.html
[성 요셉의 해] 교황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Patris Corde)

[성 요셉의 해] 교황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Patris Corde)

교황 교서

요셉 성인의 보편 교회의 수호자 선보 150주년 기념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는 네 가지 복음서 모두에서 “요셉의 아들”1)이라고 불리는 예수님을 요셉이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를 보여 줍니다.

요셉을 강조하는 두 복음사가 마태오와 루카는, 우리에게 요셉에 대해 그다지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지만, 그것으로 요셉이 어떤 아버지였고, 하느님의 섭리로 요셉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우리는 요셉이 보잘것없는 목수(마태 13,55 참조)였고 마리아와 약혼하였다(마태 1,18, 루카 1,27 참조)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고, 율법(루카 2,22.27.39 참조)으로 그리고 네 가지 꿈(마태 1,20; 2,13.19.22 참조)으로 그에게 계시가 된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고 힘든 여정 후에 요셉은 메시아가 외양간에서 태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갈 다른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루카 2,7 참조). 요셉은 목자들(루카 2,8-20 참조)과 동방 박사들(마태 2,1-12 참조)의 경배를 목격하였습니다. 이들은 각각 이스라엘과 이교도들을 대표합니다.

요셉은 용기 내어 예수님의 법률적 아버지가 되어, 천사가 그에게 알려준 대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창세기에 나온 이야기에서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2,19-20 참조) 고대 사람들은 사람이나 물건에 이름을 붙여 주면서 관계를 맺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40일이 지나, 요셉과 마리아는 성전에서 주님께 그 아이를 봉헌하였고,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에 관한 시메온의 예언을 듣고 놀랐습니다(루카 2,22-35 참조). 요셉은 헤로데로부터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이집트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마태 2,13-18 참조). 본향으로 돌아온 후 갈릴래아의 작고 알려지지 않은 고을인 나자렛에서 숨어 생활하였습니다. 나자렛은, 요셉의 본향인 베들레헴에서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자렛에 관해서 “예언자가 나오지 않았고”(요한 7,52 참조), 사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요한 1,46 참조)고 말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순례를 하는 중에 요셉과 마리아는 열두 살 된 예수님을 잃어버려 애타게 찾아다녔고,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을 찾아내었습니다(루카 2,41-50 참조).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다음으로 교황님들의 문헌에서 마리아의 배필인 요셉만큼 자주 언급된 성인은 없습니다. 저의 선임자들은 복음을 통해 전해진 많지 않은 정보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심화시켜 구원의 역사에서 요셉의 핵심적 역할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셨습니다. 복자 비오 9세께서는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2)로 선포하셨고, 가경자 비오 12세께서는 “노동자들의 수호자”3)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구세주의 보호자”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이의 수호자”5)인 요셉 성인에게 간구합니다.

복자 비오 9세께서 1870년 12월 8일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시고 150년이 지난 지금, 저는 우리 저마다의 인간적 상황과 매우 밀접한 이 특별한 인물에 대하여 여러분과 저의 개인적인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마태 12,3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의 열망은 전염병이 이어진 지난 몇 달간 더욱 커졌습니다. 우리를 강타한 전염병 확산 위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 삶은 다른 평범한 이들, 우리가 종종 잊고 지내는 이들과 함께 엮여 있고 그들에게 도움받는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신문이나 잡지의 주요 소식들 또는 텔레비전 최신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이들은 아니지만, 오늘날 이들은 우리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의사, 간호사, 상점 주인, 상점에서 일하는 이들, 환경미화원, 간병인, 운수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치안 유지에 종사하는 이들, 봉사자, 사제, 남녀 수도자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그 누구도 혼자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날마다 많은 이들이 인내심을 발휘하고 희망을 전달하며 극심한 공포가 확산하지 않도록 애쓰며 공동의 책임을 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많은 아버지, 어머니, 조부모, 교사들은 일상의 사소한 방법으로 자녀들에게 이 위기를 받아들이고 대처하며, 이 위기에 우리의 일상생활을 적응시키며 앞을 바라보고 기도하도록 힘을 실어 줍니다. 모든 선한 이들을 위하여 많은 이들이 기도하고 희생하며 간청드립니다.” 주목받지 않고 날마다 신중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가는 요셉 안에서, 우리 저마다는 곤경에 처해 있을 때의 중재자, 지원자, 안내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숨겨져 있거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이 구원 역사에서 비할 데가 없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그들의 공로에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1. 사랑받는 아버지

요셉 성인의 위대함은 그가 마리아의 배필이었고 예수님의 아버지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이 “구원의 모든 계획을 위하여”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을 내어 맡기었습니다.

바오로 6세 성인은, 요셉이 “강생의 신비와 구속의 사명을 위하여 자기 삶을 희생하면서” 부성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요셉은 성가정에 대한 자기의 법적 권한을 활용하며, 자기의 삶과 노동을 통하여 가족들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였습니다. 요셉은 가정을 사랑하라는 인간적 성소가 자기 자신, 자신의 마음과 모든 능력을 봉헌하는 초인간적 봉헌, 곧 그의 가정에서 성장하는 메시아를 위하여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이 되게 하였습니다.”8)

요셉 성인은, 구원 역사 안에서 자신의 역할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사랑받는 아버지입니다. 이는, 요셉 성인에게 봉헌되는 전 세계의 많은 교회, 그의 영성에 영감받아 그의 이름 따서 설립된 수많은 수도회, 단체들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그를 기리고자 하는 많은 전통적 표현들로 분명히 드러납니다. 무수히 많은 성인과 성녀들이 요셉 성인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 가운데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요셉 성인을 변호인이자 중재자로 선택하였고, 그에게 늘 의탁하며 그에게 청한 모든 은총을 받았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의 경험에 힘입어 다른 이들에게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을 굳건히 하라고 권유하였습니다.9)

모든 기도서에서는 요셉 성인에게 바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과, 전통적으로 요셉 성인을 기리는 3월에는 특별히 요셉 성인에게 기도를 바칩니다.10)

요셉 성인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는 “요셉에게 가시오.”(Ite ad Ioseph)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는 이집트에 기근이 들자 이집트인들이 파라오에게 빵을 달라고 할 때 나온 말입니다. 파라오는 백성들의 요청에 이렇게 답합니다. “요셉에게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창세 41,55). 파라오가 말한 요셉은, 형들의 질투심에 노예로 팔려갔고(창세 37,11-28 참조),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후에 이집트의 재상이 된(창세 41,41-44 참조) 바로 야곱의 아들인 요셉입니다.

요셉은, 나탄 예언자의 약속대로(2사무 7장 참조) 그 후손 가운데 예수님이 나신 다윗의 후손(마태 1,16-20 참조)으로, 그리고 마리아의 배필로 신약과 구약을 연결해 주는 요체입니다.

2. 온유하고 다정한 아버지

요셉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가는”(루카 2,52) 예수님의 모습을 날마다 지켜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하신 것처럼 요셉은 예수님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로 안아 주었습니다. 그는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는 아버지였습니다”(호세 11,3-4 참조).

예수님께서는 요셉에게서 하느님의 온유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을 가엾이 여기듯 주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신다”[시편 103(102),13].

요셉이 시편 기도를 바치는 동안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온유한 사랑의 하느님11)이시라는 말이 회당에 울려 퍼지는 것을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온유한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좋으신 분입니다. “그 자비 당신의 모든 조물 위에 미치네”[시편 145(144),9].

구원 역사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우리의 나약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서 우리의 훌륭하고 우수한 부분을 통하여 일하신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 계획의 대부분은 우리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다음과 말씀하십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7-9).

이것이 구원 경륜의 관점이기에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온유함으로 우리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12)

악마는 우리가 우리의 나약함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지만, 성령께서는 온유함으로 우리의 나약함을 드러나게 해 주십니다. 온유함은 우리 안의 나약함을 어루만져 주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다른 이를 지적하고 판단하는 것은 종종 우리 자신의 나약함, 약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징입니다. 온유함만이 우리가 고발하는 자의 덫(묵시 12,10 참조)을 피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그렇기에 특히 화해의 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화해의 성사는 하느님의 진리와 온유함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악마도 우리에게 진리를 말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마가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를 단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우리를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환대하고 감싸 안아 주며 격려해 주고 용서해 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우리에게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루카 15,11-32 참조).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고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4)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말처럼, 그 진리는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만나고 우리의 존엄성을 찾아주며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우리를 위한 잔치를 마련해 줍니다.

하느님의 뜻, 그분의 역사와 계획은 요셉의 두려움 안에서도 작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그분께서 우리의 두려움, 약점, 나약함 안에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또한, 요셉은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님께 우리의 길을 이끄시도록 맡겨 드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때로는 우리는 완전한 통제를 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더 큰 그림을 보고 계십니다.

3. 순종하는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 계획을 마리아에게 보여 주실 때 하셨던 것처럼, 요셉에게도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이용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모든 고대 사람들 사이에서 꿈이 그분의 뜻을 알게 되는 길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습니다.13)

요셉은 마리아의 신비스러운 잉태로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14),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첫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요셉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요셉은 바로 응답하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 요셉은 순종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극적인 사건을 헤쳐나가고 마리아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자기가 직면하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은 채 주저하지 않고 천사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마태 2,14-15).

이집트에서 요셉은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천사의 말이 있을 때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갖고 기다렸습니다. 세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그 아기를 죽이려는 자들이 죽었으니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도 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마태 2,19-20 참조). 요셉은 이번에도 바로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마태 2,21).

돌아가는 길에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마태 2,22-23). 이는 네 번째 꿈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이야기로는, 요셉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적 등록 칙령에 따라 본향에 호적 등록을 하러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길고 험난한 여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고(루카 2,1-7 참조), 예수님께서도 다른 모든 아기들처럼 황제의 등록소에 등록되었습니다. 루카 성인은 특히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의 모든 규정, 곧 예수님의 할례식, 해산 후의 마리아의 정결례식, 하느님께 첫 아기 봉헌식(루카 2,21-24 참조)을 지켰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자 하십니다.15)

요셉은 모든 상황에서, 주님 탄생 예고 때의 마리아와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예수님처럼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역할인 가장으로서 예수님께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탈출 20,12 참조) 부모에게 순종하도록(루카 2,51 참조) 가르쳤습니다.

나자렛에서의 감추어진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법을 요셉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분의 뜻은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요한 4,34 참조). 겟세마니에서 가장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조차, 예수님께서는 당신 뜻보다는 아버지 뜻을 따르기로 하시며16),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그래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을 쓴 저자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성 요셉은 직접 자기 부성의 실행을 통하여 예수의 인격과 사명에 봉사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과, 이렇게 하여 “충만한 때에 위대한 구원 신비에 협력하였다.”17)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4. 수용하는 아버지

요셉은 아무런 조건 없이 마리아를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천사가 전해 주는 말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마음이 고귀해서 자신이 율법에서 배운 것보다 사랑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여성에 대한 정신적, 언어적, 신체적 폭력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오늘날 요셉은 존경할 만하고 섬세한 남성상으로 제시됩니다. 비록 요셉은 모든 내용을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리아의 명성, 존엄성, 삶을 보호하기로 합니다. 요셉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의 판단에 빛을 비추시어 도와주십니다.”18)
우리는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일들의 의미를 종종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첫 반응은 흔히 낙담과 저항입니다. 요셉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위하여 자기 생각은 제쳐 두고,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그 일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책임지며 자기 역사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력과 화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기대와 그에 따르는 실망감의 인질로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우리를 위하여 걸어간 영적 길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용하고 화해할 때만 우리는 더 큰 역사와 더 깊은 의미를 엿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힘겹게 견디고 있는 악에 저항하라는 아내의 권유에 욥이 한 간절한 응답이 울려 퍼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요셉은 분명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기 있게 굳건한 의지로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수용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불굴의 용기로 우리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삶에 모순과 좌절과 낙담이 존재할지라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필요한 힘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서, 우리 저마다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아라.”(마태 1,2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요셉이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든 분노와 낙담을 떨쳐버리고,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단순히 단념해서가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더 깊은 의미에 열리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에 따라 살아갈 용기를 찾으면, 우리는 기적적으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못되어 버린 것 같거나 되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위틈에서도 꽃을 피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를 단죄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20).

여기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은 무엇도 버리지 않는 그리스도교 현실주의로 다시 돌아갑니다. 신비하고 되돌이킬 수 없으며 복잡한 현실은, 모든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실존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심지어 악이라고 불리는 것도”(etiam illud quod malum dicitur)라고 덧붙이십니다.19) 이러한 전체적인 관점에서 신앙은 기쁜 일과 슬픈 일 모두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믿는 것이 손쉽고 편안한 해결책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신앙은 요셉 성인에게서 우리가 본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손쉬운 방법을 찾지 않으셨고, 열린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시고 그 현실에 대한 책임을 직접 짊어졌습니다.

요셉의 수용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예외 없이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환대하며, 약한 이들에게서 특별한 관심을 보이라고 권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약한 것을 선택하셨고(1코린 1,27 참조),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시편 68(67),6]이시며, 우리 가운데 있는 이방인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셨기 때문입니다.20) 저는, 예수님께서 돌아온 탕자와 자비로운 아버지(루카 15,11-32 참조) 비유에 관한 영감을 요셉 성인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5. 창의적 용기를 지닌 아버지

모든 참된 내적 치유의 첫 번째 단계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인정하고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조차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다른 중요한 요소, 곧 창의적 용기를 더하여야 합니다. 창의적 용기는, 특히 우리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 나타납니다.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포기하고 도망칠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떻게든 맞설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능력을 발휘 할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서는 왜 더 직접적이고 분명한 방식으로 활동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건과 사람을 통해서 활동하십니다. 요셉은 하느님께 선택되어 구원 역사의 시작을 이끕니다. 요셉은 참으로 신비한 사람으로 하느님께서는 그 아기와 어머니를 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창의적 용기를 믿으시고 활동하셨습니다. 요셉은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마리아가 해산할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외양간을 준비하고, 최선을 다하여 그곳을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따뜻하게 맞이할 장소로 바꾸었습니다(루카 2,6-7 참조). 헤로데가 그 아기를 죽이려는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요셉은 꿈에서 아기를 보호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밤중에 일어나 이집트로 떠날 채비를 하였습니다(마태 2,13-14 참조).

이 이야기들을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세상이 전능하신 분의 자비에 달려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기쁜 소식은, 하느님께서는 세속 권력의 모든 오만과 횡포에도 언제나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는 길을 찾으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삶이 때때로 권력자들에게 휘둘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복음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어려움을 기회로 바꿀 수 있었던 나자렛의 목수와 같은 창의적 용기를 보여 준다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이는 우리가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창의적으로 생각하여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의적 용기를, 지붕에서 중풍 병자를 내려 하느님 앞에 데려다 놓은 중풍 병자의 친구들이 보여 줍니다(루카 5,17-26 참조). 어려움은 담대하고 끈질긴 친구들 앞을 가로막지 못하였습니다. 이 친구들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낫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19-20). 예수님께서는 아픈 친구를 당신 앞에 데려다 놓으려는 이들의 창의적인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복음에는 마리아와 요셉과 그 아기가 이집트에 머물렀던 동안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을 것, 머무를 곳, 일자리가 분명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복음이 언급하고 있지 않은 부분을 채워 넣는 데에는 큰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가정은, 모든 다른 가정들처럼, 역경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우리의 형제자매인 많은 이민처럼, 현실적인 문제들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요셉 성인이 전쟁, 증오, 박해, 빈곤 때문에 본국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많은 이들을 위한 특별한 수호자라고 믿습니다.

요셉이 나오는 모든 이야기의 끝에, 복음은 그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한다고 말합니다(마태 1,24; 2,14.21 참조). 사실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우리 신앙의 가장 소중한 보배입니다.21)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성자를 그의 어머니, 곧 마리아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신앙의 나그넷길을 걸으셨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드님과 당신의 결합을 충실히 견지하신”22)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예수님과 마리아를 언제나 보호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책임과 보살핌과 보호에 신비롭게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분의 아드님께서는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지켜 주고 보호하며 돌봐 주고 키워 줄 요셉이 필요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와 아기를 부양할 수 있는 존재를 요셉 안에서 발견하였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요셉을 신뢰하셨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셉 성인은 교회의 수호자이십니다. 마리아의 모성이 교회의 모성에 반영된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연장선이기 때문입니다.23) 요셉이 끊임없이 교회를 보호하면서, 그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우리고 교회를 사랑하면서 그 아기와 그 어머니를 끊임없이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 아기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시게 될 분입니다. 따라서 모든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죽어가는 이들, 이방인들, 수감자들, 아픈 이들이 요셉이 끊임없이 보호하여야 하는 아이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요셉 성인은 불행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 추방당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죽어가는 이들의 수호자로 불립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우리의 형제자매인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보여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고,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요셉 성인에게서 그 같은 보호와 책임감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 아기와 그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성사와 자애를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실재들 하나하나가 언제나 그 아기와 그의 어머니입니다.

6. 노동하는 아버지

첫 사회 회칙인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때부터 강조되었던 요셉 성인의 특징은 노동과의 관련성입니다. 요셉 성인은 목수로 정직하게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노동의 결실로서 양식을 얻는다는 것의 가치, 고귀함, 기쁨을 요셉에게서 배웠습니다.

취업이 다시 한번 뜨거운 사회문제가 되고, 수십 년간 번영을 누렸던 국가에서조차 실업이 최고 수준에 달하고 있는 이 시대에 고귀한 노동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요셉 성인은 노동의 모범적 수호자이십니다.

노동은 구원 활동에 참여하는 수단이며,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앞당기고, 우리의 잠재력과 능력을 발전시키며 사회와 형제적 친교를 위하여 그 잠재력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입니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정이 목적을 달성할 기회입니다. 노동하지 않는 가정은, 특히 어려움, 갈등, 별거, 심지어는 가정 해체에 특히 취약합니다. 모두가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노동을 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노동하는 이들은 하느님과 협력하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 위기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새로운 일상을 만들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과 필요성을 재발견하라는 요청일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의 노동은, 몸소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노동을 업신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의 많은 형제자매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증가한 실직은 우리가 우선시하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살펴보라는 요청입니다. 노동자이신 요셉 성인께, 그 어떤 젊은이도,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가정도 노동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우리의 확고한 신념을 표현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고 간청합시다!

7. 그림자 속에 있는 아버지

폴란드 작가 얀 도브라친스키(Jan Dobraczyński)는 저서 「아버지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Father)24)를 통하여 소설 형태로 요셉 성인의 삶을 전하였습니다. 저자는 그림자의 좋은 이미지를 이용하여 요셉을 정의하였습니다. 요셉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요셉은 하느님 아버지의 지상의 그림자였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보호하며 예수님께서 혼자 길을 가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 한 말을 떠올려 봅시다. “너희는 마치 사람이 제 아들을 업고 다니듯,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이곳에 다다를 때까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줄곧 너희를 업고 다니시는 것을 광야에서 보았다”(신명 1,31). 이와 비슷하게 요셉은 살아가면서 부성을 보여 주었습니다.25)

아버지들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돌보겠다는 책임감을 느껴야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린이들은 아버지가 없는 고아들처럼 보입니다. 교회도 아버지들이 필요합니다. 바오로 성인께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여전히 시의적절합니다.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1코린 4,15). 모든 신부와 주교는 바오로 사도처럼 이렇게 덧붙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1코린 4,15).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나는 다시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갈라 4,19).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삶의 경험과 현실을 접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제지하거나 과도하게 보호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자유를 누리며 새로운 기회들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도 요셉을 전통적으로 가장 순수한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는 그저 사랑의 표징이 아니라 소유와는 반대되는 것을 표현하는 모습의 종합입니다. 순수함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사랑은 순수할 때에만 참된 사랑입니다. 소유욕이 강한 사랑은 결국 언제나 위험합니다. 그러한 사랑은 구속하고 옥죄며 불행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사랑으로 인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자유로이 두시어 우리가 심지어 방황하거나 그분께 맞서도록 두셨습니다. 사랑의 논리는 언제나 자유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특별한 자유로써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결코 자기중심적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마리아와 예수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요셉은 단지 자기희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행복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요셉에게서 좌절이 아니라 그저 믿음만을 봅니다. 요셉의 오랜 침묵은 불평이 아니라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서막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다른 이들에게 위세를 부리는 독재자는 필요 없습니다. 권위와 권위주의를, 봉사와 복종을, 논의와 억압을, 애덕과 복지 사고방식을, 권력과 파괴를 혼동하는 이들을 거부합니다. 모든 참된 성소는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 곧 성숙한 희생의 결과로 생겨납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숙함은 사제직과 축성 생활에서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성소가 혼인이든지 독신이든지 동정이든지 상관없이 희생에서 그친다면,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은 실현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은, 사랑의 아름다움과 기쁨의 표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슬픔과 좌절을 보여 주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아버지들이 자녀들의 삶을 자신들을 위하여 살도록 하려는 유혹을 뿌리칠 때 예상 밖의 새로운 앞날이 열립니다. 모든 자녀는, 자녀의 자유를 존중하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때에만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신비가 있는 존재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무용해졌을 때 비로소 아버지와 교육자의 역할을 다하였다고 깨닫습니다. 바로 자녀가 자립하여 자기 삶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 그리고 자녀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신의 보호에 그저 맡겨져 있었던 것뿐이라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던 요셉의 입장이 되었을 때입니다. 결국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이해시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마태 23,9).

부성을 보여 주어야 할 때 소유가 아니라 더 큰 부성을 보여 주는 표징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분명 어떠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요셉과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그림자이며, 그분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고”(마태 5,45), 성자를 따라가는 그림자이십니다.

* * *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가라.”(마태 2,13)라고 하느님께서는 요셉 성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교황 교서의 목적은, 이 위대한 성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키우고 그분의 전구를 청하며 그분의 덕행과 열정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인들의 고유한 사명은 기적과 은총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아브라함26)과 모세27)처럼, 그리고 “중개자”(1티모 2,5)이시며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1요한 2,1)이시며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시는”(히브 7,25; 참조: 로마 8,34) 분이신 예수님처럼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모든 신자들이 “성덕과 자기 신분의 완성을 추구하도록”28) 도와줍니다. 성인들의 삶은 복음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참조)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인들의 삶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바오로 성인께서는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4,16).29)라고 분명하게 권하십니다.

많은 거룩한 이들의 모범 앞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자문하십니다. “그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왜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을 너무 늦게 사랑하였습니다, 예전에도 지금도 아름다우신 분이여!”라고 환호하면서 결정적 회개에 이르렀습니다.30)

우리는 요셉 성인에게 은총들 가운데 은총, 곧 우리의 회개를 위하여 도움을 요청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요셉 성인께 이렇게 기도드립시다.

구세주의 보호자시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여.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외아드님을 맡기셨고,
마리아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보호 속에서 성장하셨나이다.

복되신 요셉이시여,
저희에게도 아버지가 되시어
삶의 여정에서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위하여 은총과 자비와 용기를 얻어 주시고
모든 악에서 저희를 지켜 주소서. 아멘.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교황 재위 제8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2020년 12월 8일
프란치스코 교황

1) 루카 4,22, 요한 6,42: 마태 13,55, 마르 6,3 참조.
2) 교황청 예부성성, 교령 「하느님께서는 같은 방식으로」(Quemadmodum Deus), 1870.12.8.,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AAS) 6(1870-71), 194.
3) 노동자 성 요셉 대축일에 ACLI에서 하신 연설, AAS 47(1955), 406 참조.
4) 교황 권고 「구세주의 보호자」(Redemptoris Custos), 1989.8.15., 『회보』 56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56면, AAS 82(1990), 5-34 참조.
5)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제2판), 1014항.
6) 전염병 시기의 묵상(2020.3.27.),『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 2020.3.29.), 10면.
7)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해」(Mattaeum Homiliae), 3. PG 57,58.
8) 바오로 6세, 1966년 3월 19일 강론. 『바오로 6세의 가르침』(Insegnamenti di Paolo), VI, IV(1966), 110.
9)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Vita),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글 제6장, 6-8절, 분도출판사 2018, 61-63면, 참조.
10) 지난 40년 동안 저는 날마다 아침기도를 바치고 난 다음에, 예수와 마리아의 자매 수녀회(Congregation of the Sisters of Jesus and Mary)의 19세기 프랑스어 기도서에 나온 요셉 성인께 바치는 기도를 해 왔습니다. 이 기도는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과 신뢰를 표현하고, 심지어 요셉 성인에 대한 일종의 도전을 드러냅니다. “영광스러운 성조 요셉 성인이시여, 당신께서는 당신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실 수 있으시니, 고난과 역경의 시기에 저에게 도움을 주시러 와 주소서. 당신의 보호 아래 제가 당신께 맡겨 드리는 중대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순조롭게 해답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소서. 사랑하는 저의 아버지, 저는 당신을 전적으로 믿나이다. 제가 당신께 헛된 것을 간청드리는 것이 아니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함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니, 당신의 힘만큼 당신의 선함이 크다는 것을 보여 주소서. 아멘.”
11) 신명 4,31; 시편 69(68),16; 78(77),38; 86(85),5; 111(110),4; 116(114),5; 예레 31,20 참조.
12)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11,24., 88, 288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제2판 12쇄), AAS 105(2013). 1057, 1136-1137면 참조.
13) 창세 20,3; 28,12; 31,11.24; 40,8; 41,1-32; 민수 12,6; 1사무 3,3-10; 다니 2,4; 욥기 33,15 참조.
14) 이러한 경우, 심지어 돌을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신명 22,20-21 참조).
15) 레위 12,1-18; 탈출 13,2 참조.
16) 마태 26,39; 마르 14,36; 루카 22,42 참조.
17) 「구세주의 보호자」, 8항, AAS 82(1990), 14.
18) 프란치스코, 콜롬비아 비야비센시오 사도좌 방문, 2017년 9월 8일 시복 미사 강론, AAS 109(2017), 1061면.
19) 아우구스티노, Enchiridion de fide, spe et caritate, 3. 11: PL 40,236.
20) 신명 10,19; 탈출 22,20-22; 루카 10,29-37 참조.
21) 「하느님께서는 같은 방식으로」, AAS 6(1870-1871), 193; 복자 비오 9세, 교황 교서 Inclytum Patriarcham, 1871.7.7., I.c., 324-327 참조.
2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58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23) 『가톨릭 교회 교리서』, 963-970항 참조.
24) The Shadow of the Father, Cień Ojca, Warsaw, 1977.
25) 「구세주의 보호자」, 7-8항, AAS 82(1990), 12-16 참조.
26) 창세 18,23-32 참조.
27) 탈출 17,8-13; 32,30-35 참조.
28) 교회 헌장, 42항.
29) 1코린 11,1; 필리 3,17; 1테살 1,6 참조.
30) 아우구스티노, 「고백록」(Confessions), VIII, 11,27, PL 32, 761, X, 27, 38, PL 32, 795.

<원문: Apostolic Letter, Patris Corde of the Holy Father Francis on the 150th Anniversary of the Proclamation of Saint Joseph as Patron of the Universal Church, 2020.12.8., 영어와 이탈리아어>

영어:
http://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apost_letters/documents/papa-francesco-lettera-ap_20201208_patris-corde.html

이탈리아어:
http://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apost_letters/documents/papa-francesco-lettera-ap_20201208_patris-corde.html

교구장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님 서한

교구장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님 서한

새로운 눈과 새로운 정신으로!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새로운 감염병으로 인하여 각자의 인생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힘겹고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 확진의 증가로 더욱 방역에 힘써야 하는 상황에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또 미래에는 어떤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해답을 찾으려 노력하며 최선을 다하고 계시는 교구민 모두에게 교구장으로서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면서 그동안 숙고해온 몇 가지 생각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시대 상황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 진중하게 성찰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참다운 신앙생활은 결코 혼자만의 신심과 영성 생활이 아닌, 어려움 속에 있는 이웃들에 대한 경청과 수용의 과정이며 이에 따른 복음적인 응답입니다. 코로나19로 겪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최근 겪고 있는 태풍 피해 속에서 많은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훈훈한 행보들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과 함께하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이웃사랑의 결실이라 여겨집니다.

지금까지 몇몇 본당은 대면으로 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현실에서 영상으로 미사를 드리며 본당 신부님의 미사 모습과 강론, 묵상 글 그리고 본당 소식을 구역장과 반장들을 통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신자들은 신부님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며 신앙 안에서 용기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시골 본당 신부님은 복(伏)날 수십 통의 수박을 사 들고 어르신들 집을 직접 방문하여 한 통씩 전달하였고, 이 때문에 어르신들과 가족들은 그동안의 우울한 마음이 다 사라졌다며 행복해했다고 합니다. 또 광주 시내 어느 본당은 나눔 부스를 만들어 가진 것을 지역민과 나누고 있으며, 수해 지역에 교구 사회복지 긴급 구호 단체가 파견되어, 피해 가족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고 있고, 이웃 교구들과 본당, 남녀 수도회, 가톨릭 학교는 성금을 보내와 형제애의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각자 손을 놓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성실히 이웃사랑의 실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큰 격려와 성원을 보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의적절한 대응도 분명 필요하고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 전 분야에 걸친 보다 근원적인 숙고를 통해 새로운 교회의 모습과 방향을 찾아 정립해나가는 것이 지금의 숙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에 우리 교회의 현재와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교구민 전체가 이 요청을 절박하게 받아들여 자발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며, 코로나19 시대의 사목에 유익한 여러 가지 제안들을 보내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두 번째로, 지금의 위기상황은 단순히 우리 주변의 현실만이 아니라, 지구촌 천제의 관심사임을 직시해야 하겠습니다. 교황님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공동담화를 통해 지금은 지구 공동체가 함께 지혜를 모으며 협력해야 할 때임을 피력하고 계십니다.

“일치된 공동의 응답이 없다면, 공동의 믿을 만한 책임이 없다면, 연대와 봉사가 우선되지 않는다면, 생태 위기와 기후 변화의 도전에 대한 진정한 지속적인 해결책은 없다고 확신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와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공동담화에서, 2017년 9월 1일).

지금의 위기상황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야생동물의 생존권 존중 등 자연생태를 잘 보존하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들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질 중심과 편리 위주의 이기주의가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우리 어머니’인 지구를 얼마나 황폐화할 수 있는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지구를 소중하게 관리하고 보호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세대에게 무거운 짐을 넘겨주는 너무 미안한 일이며, 그게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어느 부부 잠수사가 바닷속에서 쓰레기를 건져 내오자 기자가 “그렇게 해도 여전히 쓰레기는 많지 않나요?”라고 질문했을 때, “적어도 방금 우리가 지나온 길은 깨끗해졌겠지요.”라며 평안히 웃던 어느 방송 광고가 생각납니다.

지구 공동체와 연결되어있는 ‘우리’는 그리고 ‘나’는 지구 황폐화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함께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교구청에서는 가능한 한 일회용 생수와 컵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일상 안에서 하나씩 실천해 나가기를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새로운 눈과 새로운 정신으로 복음을 식별해 나가야 하는 때입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함께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이 변화의 움직임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렵고 힘든 시간을 ‘위기’라기보다 ‘기회’로 바라보게 할 것이며, 고통을 넘어선 부활의 기쁨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린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 7)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지금 우리 모두에게 큰 용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0년 추석을 앞두고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

교황, ‘찬미받으소서 주간’ 초대

교황, ‘찬미받으소서 주간’ 초대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 5월 16~24일 ‘찬미받으소서 주간’을 기념하고자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이렇게 물었다. “우리 후손들에게,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이러한 물음에 힘입어 저는 오는 2020년 5월 16~24일 ‘찬미받으소서 주간’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는 공동의 집을 돌보는 것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반포 5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캠페인입니다.”

교황은 이번 메시지를 통해 생태 위기에 응답하자고 다시금 긴급히 호소했다.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이 계속되어선 안 됩니다.”

“피조물을 보살핍니다. 피조물은 좋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 함께 ‘찬미받으소서 주간’을 거행합시다.”

교황, 2020년 성주간 영상 메시지

교황, 2020년 성주간 영상 메시지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녁 저는 평소와 다른 식으로 여러분의 집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여러분이 허락하신다면, 저는 이 곤경과 고통의 때에 몇 분 동안 여러분과 대화를 갖고자 합니다.

저는 가정에서 감염을 피하고자 평소와 다른 생활을 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외출하지도 학교에 출석하지도 자신들의 생활을 하지도 못하는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가정, 특별히 사랑하는 이가 병들었거나 불행히도 코로나바이러스 또는 다른 이유로 애도를 경험한 분들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
요즈음 저는 홀로 있는 사람들, 이 순간을 대하기가 더욱 힘든 사람들을 자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어르신들, 곧 저에게 아주 친애하는 분들을 생각합니다.
저는 코로나바이러스 환자들, 병원에 있는 사람들을 잊지 못합니다.
저는 이 팬데믹의 치료를 위해 또는 사회에 필수적인 봉사를 보장하고자 스스로 위기 상황으로 들어간 분들의 관대함을 알고 있습니다.
매일, 매시간, 그토록 많은 영웅들!

저는 또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재정적 곤란을 겪으며 일자리와 미래를 걱정하는지 기억합니다.
감옥에 있는 이들, 전염병에 대한,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을 걱정하는 두려움이 뒤섞인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도 생각이 미칩니다.
저는 자신을 보호할 집을 갖지 못한 행려인들을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힘든 시간입니다. 많은 이에게, 아주 힘든 시간입니다.

본인은 이를 알고 있고, 이러한 말로, 모든 이에게 친밀함과 애정을 말로 전하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면, 이 시간을 최선으로 활용하도록 애씁시다.
관대한 마음을 가집시다.
우리 이웃에 있는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도웁시다.
가장 외로운 이들에게 연락합시다.
아마 전화나 소셜 네트워크로 할 수 있겠죠.

이탈리아와 세계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합니다.
우리가 고립되어 있을 때조차, 생각과 영은 사랑의 창의력을 띠고 멀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여느 때와 다른 식으로 성주간을 거행할 것입니다.
성주간은 복음의 메시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메시지를 드러내고 요약합니다.
그리고 우리 도시들의 침묵 속에서, 부활 대축일 복음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5,15).
되살아나신 주님 안에서, 생명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이 파스카 신앙은 우리의 희망을 양육합니다.

저는 오늘 저녁에 그것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더 나은 때를 향한 희망, 그때에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고, 마침내 악과 이 팬더믹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것은 허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희망입니다.
서로의 곁에서, 사랑과 인내 안에서, 우리는 지금 이 날에 더 나은 때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저를 여러분의 집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어린이들을 향해, 어르신들을 향해 온유한 손짓을 하십시오.
그들에게 교황님이 가까이 있으며 기도한다고, 주님께서 곧 우리 모두를 악에서 구하실 것이라고 말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좋은 저녁식사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곧 다시 만납시다!

인류를 위한 특별 기도와 축복,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주례

인류를 위한 특별 기도와 축복,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주례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는 3월 27일(금) 오후 6시(한국시각 28일 새벽 2시)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기도와 성체조배를 하시고,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특별 교황 강복(Urbi et Orbi : 로마시와 전 세계에)을 내리셨다.

교황 성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 이하 코로나19)을 위한 특별한 강복식을 갖으셨는데, 평소 같았으면 ‘성 베드로 광장’은 교황의 알현에 참석하기 위한 신자들과 관광객들로 붐볐겠지만, 이탈리아의 코로나19 봉쇄령으로 발길이 끊긴 상황이라 텅 빈 광장에서 묵묵히 강복식을 치르신 것이다.

교황 성하는 “수 주째 저녁이 이어지고 있으며 짙은 어둠이 이 광장과 거리, 도시에 드리웠다. 생명을 앗아가고 모든 것을 먹먹한 침묵, 고통스러운 공허함으로 채우고 있다”라고 말씀하시고, 코로나19는 온 세계가 모두 한 배에 타고 있다는 점을 일깨웠다며, 우리는 예수님이 잠든 사이 배가 침몰할 것을 두려워하던 제자들과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폭풍은 우리의 취약함과 일상을 채우던 불필요한 거짓 확실성을 드러낸다”며 “이것들은 우리를 마비시킨다”라고 지적하셨다. 이어 “우리 모두는 정신없이 달리기만 하면서 전쟁과 부당함을 무시하고 가난한 자들과 병든 세상을 외면했다”며 “그럼에도 우리는 병든 세상에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계속 나아갔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이제야 폭풍을 마주하고 하느님께 간청하고 있다고 강조하셨다.

교황 성하는 “지금은 하느님이 심판하시는 때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무엇이 중요한지 선택해야 할 시간”이라며 “필수적인 것을 그렇지 않은 것들로부터 분리해야 할 시간”이라고 말씀하셨다. 코로나19 확산 속에 의료진, 슈퍼마켓 직원, 경찰관, 청소부, 성직자들, 자원봉사자 등 두려움 속에서도 몸을 던진 이들의 용기와 희생을 본받자고 강조하셨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전대사(全大赦)에 관한 교령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전대사(全大赦)에 관한 교령

교황청 내사원

문서 번호 200320c

전 세계적 질병 확산의 현 상황에서 신자들에게 특별 대사를 수여하는 교령

특별 대사의 은총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곧 통상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라고 불리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신자들과 보건 의료 종사자들은 물론 그 가족들, 기도를 포함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그들을 돌보는 모든 이에게 수여된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바오로 성인이 로마 교회에 보낸 이 말씀은 교회의 역사 전체에 울려 퍼지며, 온갖 고통과 질병과 재난에 맞서는 믿는 이들의 판단을 이끌어 준다.

온 인류가 보이지 않게 은밀히 퍼져나가는 전염병의 위협에 처한 이 순간은 이제 언젠가부터 압도적으로 모든 이의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또한 나날이 극심한 두려움과 새로운 불확실성, 무엇보다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의 확산이 이어지고 있다.

교회는 거룩한 스승의 모범을 따르며 언제나 아픈 이들에 대한 돌봄을 그 중심에 두어 왔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가르치신 대로 인간의 고통은 이중의 가치를 지닌다. “고통은 그것이 세상의 구속 사업이라는 하느님의 신비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초자연적이요, 그 안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자기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있으므로 또한 지극히 인간적입니다”(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 31항).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최근 며칠 동안 아버지로서 우리 가까이 계심을 보여 주시며 코로나바이러스로 아픈 이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거듭 초대하셨다.

본 교황청 내사원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고통받는 모든 이가 바로 그 고통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구원에 이르는 고통」, 30항)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규정에 따라 교황의 권위로(ex auctoritate Summi Pontificis) 대사의 은총을 허용한다. 내사원은 주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는 마음으로, 지금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이 전염병이 개인의 회개를 열어 주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고통받는 신자들에게는 전대사가 수여된다. 이들은 보건 당국의 명령으로 병원이나 자택에 격리 상태에 처해 있지만, 어떠한 죄도 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통신 매체를 통하여 미사성제의 거행에 영적으로 결합되고, 묵주기도를 바치며, 깊은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 또는 다른 형태의 신심을 실천할 때에, 전대사를 받게 된다. 또는 하느님을 믿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시련을 봉헌하며,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전대사의 일반 조건(고해성사, 영성체, 교황님의 지향에 따른 기도)을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지니고 적어도 신경, 주님의 기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바치는 경건한 간구 기도를 바칠 때에, 전대사를 받게 된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신 거룩한 구세주의 말씀에 따라,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범을 본받으며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코로나바이러스에 시달리는 병자들을 돌보는 의료 종사자와 가족과 그 밖에 모든 이도 마찬가지로 같은 조건을 채울 때에, 전대사의 은총을 얻을 것이다.

또한 내사원은 전 세계적으로 질병이 확산되고 있는 지금 이때에, 전능하신 하느님께 이 전염병 확산의 종식,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위로, 주님께서 당신께로 부르신 이들의 영원한 구원을 간구하고자, 성체 조배나 적어도 30분 이상의 성경 봉독, 또는 묵주기도나 십자가의 길이나 하느님 자비를 구하는 기도(Chaplet of Divine Mercy)를 바치는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같은 조건을 채울 때에 기꺼이 전대사를 수여한다.

교회는 병자성사를 받을 수 없고 노자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성인들의 통공에 힘입어 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 드린다. 또한 임종의 순간에 놓인 신자들이 올바른 자세를 지니고 살아오는 동안 습관적으로 어떠한 기도를 바치기만 했다면(이러한 경우에 전대사에 요구되는 세 가지 일반 조건은 교회가 채워 준다.), 교회는 이들에게 전대사를 수여한다. 이러한 대사를 얻을 수 있도록 십자고상이나 십자가를 활용할 것을 권고한다(「대사 편람」 [Enchiridion Indulgentiarum], 12항 참조).

평생 동정이신 복되신 마리아께 비오니,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교회의 어머니, 병자의 치유이시며 신자들의 도움, 저희의 변호자이신 성모님, 고통받는 인류를 도우시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이 전염병의 악에서 저희를 구하시며 저희 구원과 성화를 위하여 필요한 모든 선익을 얻어 주소서.

이 교령은 유효하고, 이에 반대되는 규정은 모두 무효이다.

로마 내사원에서
2020년 3월 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며 보편 교회의 보호자 성 요셉 대축일

내사원장 마우로 피아첸차 추기경
부원장 크시슈토프 니키엘 몬시뇰

<원문 : Decree of the Apostolic Penitentiary on the granting of special Indulgences to the faithful in the current pandemic, 2020.3.19., 영어와 이탈리아어도 참조>

영어 : https://press.vatican.va/content/salastampa/en/bollettino/pubblico/2020/03/20/200320c.html
이탈리아어 : http://www.vatican.va/roman_curia/tribunals/apost_penit/documents/rc_trib_appen_pro_20200319_decreto-speciali-indulgenze_it.html